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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과 비교 의식의 실체

by 노엄Jr. 2021. 2. 20.

사람은 누구나 비교하면서 산다. 비교해서 기분 나쁜 게 오래가지 않으면 괜찮다. 지금부터 얘기하는 것은 인간적인 레벨을 훨씬 뛰어넘는 심각한 수준의 비교 의식에 관한 것이다. 강박적으로,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는 케이스이다.

 

내가 남보다 잘났든 자꾸 비교를 한다는 건 열등감이 있다라는 것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자신의 자아 안에서 결정짓는 게 아니라 타인과 비교해서 결정짓고, 언제나 타인과 싸우면서 살아간다.

 

"나는 지금 이것을 하고싶다." ( X )
"나는 우월해지고 싶다, 나는 그 사람보다는 잘되고 싶다." ( O ) = 마음의 중심

따라서 개인적 호불호가 불분명
자기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가, "우월해지고 싶다"의 그림자에 가려짐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하니 친절하게 웃으며 이야기 하지만, 그 마음속은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고 상대방을 향한 적대감이 있다. 쉽게 사람을 미워한다는 뜻이다. 관심 없는 사람인데 그저 인정받기 위해서,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 인간관계를 하니까 쉽게 피곤해진다.

 

좋은 이미지가 되기 위해서 인간관계를 하다보니 타인과 진정으로 교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이 타인에게 '의지'한다. 

"어서 나를 칭찬해!"
"어서 나를 좋은사람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사실은 밝게 웃으며 대화하고 있어도 진짜로 상대방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고 온통 나에게 관심이 있다. 타인에게 사회적 부분은 의지하지만 '능력'면에서는 의지하지 않으려 한다. 본인이 능력 없는 사람이 되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인정 못 받는 것이 가장 두렵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은 그들의 참견을 싫어하는 성향과 모든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는 '독립심'으로 발현된다.

 

"당신은 나를 인정하는가 안하는가?"
"날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와 같이 온통 자신을 향한 평가에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타인의 비판, 비방, 모욕 등, 자신의 자존감을 상처 입히는 말에 매우 취약하다. 일반적으로 이것을 사람 스트레스가 많다고 한다.

 

어릴적 극단적으로 타인과의 교감이 없을경우, 위험한 일이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상상력을 관장하는 뇌의 영역이 발달하는데, 이러할 경우 편도체의 기능이 저하되어 두려움 등을 느끼는 위기대처 능력 부분이 축소된다. 

 

사람에 대한 경험(교감) 부족 -> 사람에 대한 경험을 갈구 -> 색다른 경험을 갈구 -> 도전 정신 

 

이러한 사람들로만 사회가 이루어져 있다고 상상해보자. 사람들은 서로를 미워하며, 믿지 않고, 각자 자신만의 길을 가면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기만을 바란다. 서로 인정해주기만을 바라는 세상에서는, 서로가 같은 먹잇감을 노리는 라이벌이며, 치열하게 경쟁해서 쟁취하려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겉으로 자본을 추구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본을 통한 안정감이 절대로 아니다.

 


열등감의 원인

 

모든 사람의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
남에게 인정받으려고 갈구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내 삶은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라

- 알프레드 아들러

 

프로이트, 융과 더불어 3대 심리학 거장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열등감의 원인은 "사회적 감정의 결여"라고 여러 차례 강조한다. 그리고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카렌 호나이에 따르면 열등감의 원인은 "소속감의 결여"라고 한다.  즉 다른 사람과 진심으로 교감할 수 없기 때문에 열등감이 생긴다는 뜻이다.

 

사실 열등감은 실제 열등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실제로 열등하든지 우월하든지 그 결과에 따라서 열등감을 갖는 게 아니라 인간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비교하지 않는 연습]의 저자 가토 다이조는 이것을 "애정결핍"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나를 충분히 사랑해 주고 인정해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부모가 나에게 "이 바보야 이 멍청아"라고 해도 크게 상처 받지 않는다.

 

부모가 자신을 충분히 인정해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부모의 쓴소리는 큰 상처가 되지 않는다.
친구가 자신을 충분히 인정해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친구의 오지랖이 큰 상처가 되지 않는다.
리더가 조력자를 충분히 인정해준다는 믿음이 있다면 그들은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한 가지의 대의를 향해 나아 갈 수 있다.

 

하지만 부모가 자신을 사랑해 준다는 믿음이 없어 인정해 주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있을 때, "이 바보야 멍충아"라는 말은 크게 상처가 될 수 있다.

 

열등하다는 사실 자체가 원인이 아니라, 내가 열등하면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게 열등감의 원인이다.
내 자체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이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던 것이다.

 

이들은 어렸을 때 부모가 무관심했거나 혹은 비현실적인 기대를 한 것이다. 욕심을 부린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아이의 노력과 행동에 사랑을 표현해주지 않고 부모가 만족하는 결과물이 있을 때만 칭찬하고 없으면 혼을 내거나 한다. 그리고 어릴 적에 부모가 충분히 기본적인 심리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 아이들은 세상을 적대시하며 이겨야만 하는 그런 상대로 보게 된다. 

 

높은 지위의 권위적인 아버지를 둔 자식이 자신감이 없고 항상 주눅 들어있는 경우는 영화의 클리셰가 될 정도로 흔하다. 자신을 신뢰하지 않는 아버지를 보는 순간 아이는 몸이 얼어붙어나, 과도하게 방어적이거나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다.

 

무관심한 부모는 아이를 방치해둔 채, 아이들은 원래부터 알아서 성장해나간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행동은 아이에게 관심이 있는 부모보다 더 큰 비중으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며, 아이를 위한 불편하고 어려운 길보다 인간의 사회성과 학습능력이 알아서 눈을 뜰 것이라는 합리화에 큰 비중을 둔다.

 

자기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DNA에 내재가 돼있다는 사실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원시 시절부터 그렇듯 누가 딱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밥을 먹고, 친구를 사귀고, 연애를 했다. 그러나 먹이 사실 중간에 있던 나약한 인간이 최상위 포식자로 등극하게 되면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법과 관습이 생기고, 새로운 직업이 나오고, 인간관계는 더 복잡해지고, 이제 인간은 더 이상 DNA 속 지식만으로는 '잘' 살 수 없게 되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험난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잘' 살아가기 위해 더 많은 지식으로 무장할 필요가 있게 되었고,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죽어도 '유지'해야 했었다. 그게 '책'의 시작이다.

 

이렇게 복잡해진 세상에서 아이는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자라주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의 "넌 왜 그것도 못하니"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부모에게도 '아이는 관심을 갖고 응원을 하고 지식을 전달해야 하는 존재'라는 개념이 DNA에 탑재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1970년대만 해도 아이들은 밖에서 많은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면 오랜 시간과 인내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문물의 발전으로 인해 밖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줄어들고, 원하는 것은 빠르게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즉석 보상심리(instant gratification)에 관한 연구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만큼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는 뜻이다. 현재의 아이들은 사회성이 부족하고, 쉬운 보상의 유혹에 약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예전과 같이 '잘' 성장하기 위해선, 부모가 환경 요소에 잘 개입하여 문물이 바꿔놓은 현재 사회의 흐름에 조금은 반항을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부모의 관심과 개입이 없으면 '인간 사회'와 '아이들'의 거리감은 계속 멀어진다. 더 많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사회성 부족이나 인내심, 또는 의지력 부족이라는 꼬리표를 달 것이며, 이러한 아이들은 자라서 부모가 되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우리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고 인정해 주지 않는 이유는 그들도 그들이 속한 사회에서 사랑받고 인정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미니스트와 인권운동의 본질 또한 계속해서 왜곡될 것이며, 그들은 사회 구조적 단계에서의 변화를 원할 것이다.

 

대부분의 회사의 리더가 아랫사람들을 사랑하고 인정해 주지 않는 이유 또한 같다. 리더는 혼자서 뭐든 해내려 하는 독립적인 성향이 강한 경우가 많다. 즉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남들의 몇십 배, 몇백 배로 노력을 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항상 아랫사람을 보고는 성에 차지 않는다. 본인이 기대하는 만큼의 생산성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인정하는 사람은 그들 이상의 "결과"를 내는 사람들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부모가 그들에게 원했던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열등감의 3대 방어기제

 

1. 자기 자랑 

자기 자랑을 많이 하는 사람은 자신감이 있는 게 아니고 열등감이 있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알려진 개념일 것이다. 인정을 못 받고 자랐기 때문에 어떻게든 인정받기 위해서 내가 내 입으로 나의 우월함을 계속 얘기하는 것이다. 자기 자랑은 인정받지 못할까 봐, 그래서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될까 봐 불안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2. 자기 비하 

또 한편으로는 자기를 굉장히 부족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나까짓게 뭘 해"라면서. 나를 깎아내리고 낮추는 말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아니야 넌 괜찮은 애야 네가 얼마나 멋진데"라는 말을 듣고 싶다는 마음이 숨겨져 있다. 물론 이 프로세스는 대게 무의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본인은 그런 의도를 가지고 말하고 있는 건지를 모른다.

 

3. 타인 비난 

다른 사람의 잘못을, 혹은 약점을, 찾아내고 비난한다. 예를 들어 타인이 무식하다고 비난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지식에 대한 불안감이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면서 내 불안을 해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불안감은 더 심해지고 열등감도 더 심해진다.(신경과학: 뇌 호르몬/도파민과 옥시토신))

 

 

어느 정도의 열등감은 인간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좋은 감정이다. 내가 열등하다는 걸 인식하면 그만큼 노력해서 실력을 키우게 된다. 그런데 그게 행복을 망칠 만큼 불안감이나 적대감이 심한 상태에서 하는 거라면 성공을 해도 크게 행복해지지 않는다. 실제로 열등감은 극복할 수 만 있다면 더욱더 크게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한다.

 


개인적 열등감의 해결방안

 

마음이 통하는 진짜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열등감이 그렇게 심하지 않다. 그 사람이 나를 그 사람이 속한 사회의 일부라고 생각해준다는 믿음은, 그 사람과 심리적으로 '같은 편'에 서게 만들어준다. 아무리 주변 모두가 적인 사람도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만큼은 아군이다.

 

실제로 사회에선 중간관리직에 공감능력이 강한 감각형 사람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는 것을 자주 목격할 수 있는데, 이것은 리더가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을 원하면 원할수록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IT업계나 크리에이티브 업계 등 사고력에 많은 비중을 두는 사회에서는 이들의 업무 수행능력이 저평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 '윗사람 비위만 잘 맞추는 사람'이나 '간신'과 같이 비판적으로 묘사된다. 빌 게이츠와 같이 모든 욕구를 해소하고 남을 돕는 '자기 초월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다.

 

 

세상에 완벽한 성격의 아이로 키울 수 있는 부모는 없다. 인간은 다 불완전하다. 부모를 원망하는 건 자신을 더 망가뜨릴 뿐이다. 열등감의 원인은 부모에게 책임이 클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신경과학 연구결과가 말하듯, 원망은 하면 할수록 도파민이 분비되어 중독적이고, 원망을 하는 이유를 증폭시킨다. 반대로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사람의 입장이 된다면 상황은 역전된다. 우리는 남을 도울 때 옥시토신이 분비되고 가장 큰 행복과 보람을 느낀다. 그리고 그 행복은 원망을 누그려뜨리는 힘이 있다.

 

다만 극단적 상황에서 이것의 실천은 까다로울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하던 행동을 반복한다.
(예) 아이가 못미더워 잔소리를 하던 부모는, 아이가 커서 믿음직스러워졌음에 불구하고 예전에 하던 행동을 반복한다.

-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서로에게 느끼던 감정을 반복해서 느낀다.
(예1) 아이가 한심하게 느껴졌던 부모는, 아이가 큰 성공을 한다해도 "저 아이는 운이 좋았구나" "좋은 동료가 있었구나" 등 주변 환경의 덕으로'만' 생각하게된다. 아이의 큰 성공에서 '한심했던' 아이의 기여도는 0%이다.  
(예2) 어렸을 때 부모에게 좌절감을 느끼던 아이는, 커서 독립하여 더 이상 좌절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어도, 부모의 얼굴을 보면 좌절감을 느낀다.

 

서로에게 습관적으로 느끼는 격한 감정은 서로의 존재가 신호가 되어 반복된다. 이것의 대한 일시적 방편으로 우리 사회는 이혼이나 별거, 양육권 변경 등 여러 방편을 도입했다. 극단적 상황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물리적 거리감'이다. 신호를 멀리 떨어뜨려놓는 것으로 습관적 행동 및 감정이 반복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자기전 침대에서 스마트폰을 보지 않기 위해 거실에서 충전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이렇게 신호가 멀어진다면, 습관은 점점 형태를 잃어간다. 원망도 어느정도 누그러지며 조금씩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여기서 부모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연결되는데, 크게 두가지 형태를 띈다.

 

첫번째는 부모의 '고통'과 '공포', '갈망' 등 '감정'에 초점을 주는 교감적 형태이다. 부모도 인간이고 이것저것 신경쓰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험난한 세상에서 살면서 고통과 공포 속에서 나를 낳아주고 보살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대부분은 사람들은 이와같은 이해의 과정을 겪는다.

 

교감적 형태의 특징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 중 가장 '쉽고 편하다'이다. 그래서 대체적으로 사람은 이것 이외의 방법을 택하지 않는다. 두번째 방법은 교감능력이 발달하지 않아 첫번째 방법을 선택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특수한 형태이다. 이 방법의 특징은 첫번째 방법보다 어렵고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교감 능력이 떨어질 경우, 분노 이외의 감정을 공감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친구가 상사에게 무능력하다고 지적을 받고 있거나 노력하는데도 주변에서 인정을 못받는 사회적 문제를 겪고 있을 경우, 이것에 대해서는 공감능력이 탁월하지만, 친구가 불안, 우울증 등의 불확실함의 공포에서부터 발현되는 심리적 문제를 겪고있을 경우 하나도 공감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두가지 문제를 융합하여 복합적인 감정을 이해할 수 있지만, 교감 능력이 떨어질 경우 "한쪽"만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복합적인 부모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무의식적인 교감 능력이 처리하지 못한 작업분을 의식적인 사고 능력으로 옮겨서 처리한다. 신경과학에서 기저뇌가 처리하지 못한 분량을 전두엽에게 맡기는 형태는 인간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형태인데, 대부분의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처리가능한 '교감'부분에서 이런 과정이 발생한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부모도 힘들었을 것이다. (X)
부모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 (O)

이렇게 전두엽으로 옮겨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기심을 촉발시킨다. 이러한 호기심은 심리학, 사회과학, 신경과학, 정신분석학, 철학 등 사회에 대한 인지적 욕구로 연결된다. 주변에 사람의 심리를 변태적으로 분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와같은 케이스일 가능성이 높다. 

- 개인적 고찰 -
자폐증, 트라우마, 편도체 발달장애, 편도체 손상 등의 이유로 교감능력은 발달하지 않는데, 공통적인 것은 '편도체'이다. 몇년전 국내 연구진은 '편도체의 전두피질과 회백질 기능 장애'가 '사이코패스'를 만든다 발표한바 있다.

모 국내 대학 교수는 "사이코패스는 공감 능력이 거의 없는 대신 분노를 인지하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인다"면서 "임신 중 질병 및 약물 노출 사고 등에 의한 뇌 손상이 사이코 패스 기질을 만드는 결정적 원인일 가능성이 높다"와 같은 한심한 소리를 하는데, 사이코패스가 분노를 인지하는 데 뛰어난 이유는 그들은 다른사람 보다 분노가 많고, 그러한 이유는 그들이 평생토록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배척당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반사회적 인격장애와 사이코패스가 동일시 된다.

교감능력이 부족한 이들의 '사회'에 대한 인지 방향은 보통 사람들의 반대의 방향성을 띈다.

감정을 경험 -> 경험을 통한 지식 습득 (X)
지식을 습득 -> 습득한 지식의 실험 -> 감정을 경험 (O)

- 실제 과정 -
1. 희미한 감정을 경험
2. 불확실함을 해소하기 위해 수 많은 생각을 함 -> 정답이 나오지 않음 
3. 책 등의 타 매체를 통해 타인의 지식을 습득
4. 습득한 내용과 2에서 나온 아이디어를 결합하여 한가지의 가설을 세움
5. 4의 가설을 실험
6. 실험 결과가 합리적이라면 결과를 기억에 저장
7. 6을 통해 감정을 간접적으로 경험
- 개인적 고찰 -
임마누엘 칸트가 경험론(empricism)과 합리론(rationalism)을 통합할 때 까지 경험론자들과 합리론자들의 치열한 공방이 있었는데, 아마도 이러한 인지의 방향성의 차이 때문에 생긴 '우선도'의 차이가 원인인 것 같다.

이들 시대 때, 경험론자들보다 합리론자들이 더 열광적으로 자신들의 논리를 정리하고 책을 펴냈는데, 합리론자들의 '인지적 욕구'가 경험론자들보다 높았고, '인정의 욕구' 또한 높았다는 것으로 추정된다. 데이비드 흄과 같은 경험론자들은 '합리성'보다 '질서'를 우선시하는 이른바 '꼰대적 성향'도 보였는데, 이와 같은 공동체 우선 성향은 경험론자들의 공감능력이 합리론자들의 공감능력보다 높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보아 합리론자들의 열등감이 경험론자들의 열등감보다 더 고차원적인 것이였고 행복도 또한 낮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식을 우선시할 경우 방대한 타인의 지식을 빌려올지망정, 그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실행하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붕어빵의 '알맹이'가 없는 느낌. 반대로 경험을 우선시하게되면 타인의 표현 방식을 빌려올 수 없음으로, 자신의 지식을 어떻게 포장하여 전달할 지 모른다. 마치 붕어빵의 '껍데기'가 없는 느낌이다. 그리고 타인의 관점을 간접 경험할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든다.

이들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데 몇백배의 노력이 든다. 그래서 최소한의 교감능력이 개화하기 전까지 타인의 감정에 거의 관심이 없고, 개화하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

 


감각적인 방법으로 이해를 하건 지식을 통해 이해를 하건, 이러한 '이해'는 '감정의 독립'으로 연결된다. 부모나 타인을 '내가 인정받아야하는 강자'가 아니라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인지하게 된다. 나 자신의 행동의 이유가 더 이상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탈바꿈한다. 이 곳이 진짜 '나'를 찾는 여정의 시작점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1. 부정적 감각의 신호에서 물리적으로 멀어져라.
2. 타인은 당신을 인정해줘야할 의무가 있는 강자가 아니고, 당신 또한 원한다면 타인을 인정해줄수 있는 강자, 즉 리더가 될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라.
3. 진짜 당신을 만족시키는 것은 무엇인지 찾아라.

심리학적 해결방안

 

심리학에서는 열등감의 해결방안으로 타인과의 진정한 교감을 제시하는데, 심리학이 언제나 그렇듯 좀 추상적이다.

- 진정한 교감, 진정한 인간관계란 내 외모가 어떻든 내 능력이 어떻든 그대로 상대방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 나 자체로 충분한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 상대방에게 나 있는 그대로 존재의 의미를 주기 위해서는 먼저 내가 나를 있는 그대로 가치 있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 타인에 의한 내가 아닌 진짜 나 자신을 찾고 나대로 살아야 한다.
- 돈이나 직업, 신분과 같은 그런 조건으로 나를 만들어 가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가치감을 내가 스스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나 자체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믿고 싶어도, 마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라'와 같이, 평생 동안 이와 상반대는 가치관으로 생각하던 사람이 이의 방향을 바꾸기는 무리한 면이 많다. 내 안에 끓어오르는 가치감은 그것에 대한 근거 없이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에서 다음과 같은 좀 더 체계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정신분석학적 열등감 해결방안

 

1. 나의 열등감 인정하기

"그래 나는 진정한 인간관계가 없어"
"그래 난 애정결핍이야"
"그래 나 열등감이 있어서 자꾸만 사람들과 나를 비교해"

라고 인정을 하는 것이 첫 번째다. 무의식에 숨어있는 소속감의 결여를 의식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것을 메타인지라고 한다.

 

2. 진짜 나를 찾기

"나는 이것을 좋아하는구나"
"나는 이것을 할 때 스트레스가 없구나"
"나는 이것을 잘하는구나"
"나는 경쟁을 싫어하는구나" 혹은 "나는 경쟁을 좋아하는구나"

나의 감정, 나의 욕구, 나의 재능을 찾아야 한다.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하고 무엇을 할 때 내가 행복한지를 찾아내야 한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항상 타인을 만족시키는 것을 우선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나 자신이 사라지게 된다. 개인적 호불호는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이 되어버린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의 욕구와 재능을 발견할 틈이 없다. 

 

 

3. 정서적 연결에 집중하기

 

사람들과 진정으로 교감할 수 있다면 인생은 바뀐다. 정신분석학은 이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한다.

"능력이 전부는 아니야"
"나는 능력으로 사람들을 판단할지 몰라도, 나를 능력으로 판단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어" 

능력으로 나를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정서적 연결에 집중하라. 누군가를 나의 경쟁 상대로 보기보다는 혹은 나를 인정해주는 대상으로 보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진정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려면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가 나에게 관심 주기를 바라지만 말고 내가 먼저 관심을 갖고 진심을 다해 다가가야 한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 진심은 통한다. "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얘가 나를 받아들여 줄까?" 이런 거 계산하지 말고 내가 그 사람이 좋으면 계속해서 진심을 보여주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내 약점이나 강점에 별로 관심이 없다. 오히려 내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내가 그 영화를 보고 뭘 느꼈는지, 여행 가고 싶은 곳은 어디인지, 이런 걸 더 관심 있어한다. 누군가에게 잘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다가가지 말고 나 있는 그대로, 나 자체로 다가가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내가 누군지 나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 찾아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능력'으로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을 필요성이 사라진다. 이미 내가 이 사회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케이스

 

여러 학문에서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타인과의 교감'이 실행하기 힘든 극단적 케이스도 존재한다. 보통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으로 공감능력이 발달하지만, 사람과 거의 한번도 교감을 해본적이 없는 상태로 뇌가 발달하게되면 어른이 되어서는 뇌의 공감능력 부분에 접근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그래서 이들은 특이한 점으로는 그들이 그들 있는 그대로 다가가게 되면 대부분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들을 '도덕성이 부족한 사람', '통제하려는 사람', '착취하는 사람', '남 괴롭힐때만 머리가 좋아지는 사람', '악의적 장난을 치는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것 이다.

 

-개인적 고찰 -
이러한 특성은 반사회적 인격장애와 개념이 매우 비슷한데, 정말 같은 개념인지는 모르겠다. 사회에 너무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혹은 실제로 수는 적지만 그들의 '부정적인 특성'상 많아 보이는 것 뿐일 수도 있다. 인간의 '해마'는 긍정적인 것보다 부정적인 것을 부각시키고 위험에 대처하는 능력이 있다.

 

타인으로부터 감정적인 독립을 한 이후에도 이들은 타인을 통하여 얻고싶은 것은 있지만, 그들 자신이 뭘 얻고 싶은지 잘 모른다. 그래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타인을 향한 원망을 자기자신에게 투영하고, 이것은 자기자신에 대한 '통제력'으로 변모한다.

"당신들때문에 내가 불행한거야" -> "내가 노력해서 남 보란드시 살면된다"

 

또한 '감정적인 독립'은 한번에 딱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정도 독립을 한 이후에도 끊임없이 과거의 열등감이 스멀스멀 자신을 압박한다. 경계를 조금이라도 늦추면 또다시 타인에게 감정적으로 의존하게되고, 감정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자신 또한 타인을 인정해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조금 더 과도하게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기자신을 치켜올리는 성향이 발현될 수 있는데,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이다. 또한 주도권을 병적으로 빼앗기기 싫어하는 성향도 발발하는데, 이 경우 "피해의식"이라고 한다.

 

평생을 타인의 평가에 의존하던 사람은 타인에게 미움받을까봐 타인을 공격하지 못하는 성향이 강한데, 자신이 피해를 입었을때도 자기방어조차 미움받을까봐 못하는 성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성향이 강할수록 극복하는 데 강하게 반대 성향을 지향하게 되는데, 이것은 과도한 공격성으로 발현된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다 = 공격성이 강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겉으로는 공격적이지만,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공격적이지 못하다. 이들의 중심에는 미움받기 싫은 어린아이가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위해 싸움을 통한 경험을 추구하고, 자신 또한 승자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 싶어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이들은 타인에 대한 분노를, 자신의 '경쟁력'으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이들은 누구보다도 '독립적'인데, 그들은 '의존성'이 강한만큼 그것을 극복하기위해 '독립심'을 추구한 결과이다. 

 

이런 사람들이 타인과 인간관계를 전혀 맺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 또한 나름 인생을 살면서 부족한 부분을 감각형의 사람들의 '동정심' 통해 채우고, 자신들에게 나름 친절한 가면을 씌우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독립심을 강하게 추구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동정심'을 호소하여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을 완벽하게 그만두어 버린다.  

 

이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 원치 않는 꼬리표를 달리고 배척받는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은 거의 무조건 실패한다. 이들에겐 서로 치고 받고 싸우면서 사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 개인적 고찰 -
이런 사람도 자신은 경쟁을 싫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데, 경쟁에서 진 기억이 많아 경쟁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것 뿐이다.

이들이 충분한 메타인지과정을 거치면, 자신이 경쟁을 선호하고, 교감을 통한 관계보다는 자신보다 강한 자나 강력한 라이벌과의 경쟁을 통해서 서로를 인정하고 알아가는 과정이 더 자연스러운 형태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감각형 사람들에게 '이기주의자'로 비판받으나, 실은 싸우는 것으로 밖에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성장하며 '타인의 노력와 열정을 인정하는 법'을 익히며, 타인과 교감하는 사람이 되기는 힘들겠지만 존경받는 인물은 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사회는 이상하게도 모두에게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개인적 결론

 

몇 세기에 걸쳐 연구된 열등감의 실체와 그에 대한 사회적 영향은 진화론, 신경과학, 정신분석학, 사회과학이 총동원되야지 이제야 겨우 그 윤곽이 잡히는 수준이다. 인간의 뇌는 항상 더 편하고 쉬운 선택을 하도록 게으르게 진화했다. 하지만 열등감은 편한 선택을 뛰어넘어 인간의 경쟁심리를 부추겨 전두엽의 사용 비중을 늘렸고, 편도체의 사용비중을 줄여 인간이 위험하다고 생각하던 미지의 영역에 손을 대게 만들어 과학을 발전시켰다. 계속 파괴와 번영을 반복하는 개똥망게임인 인류의 역사에 비료의 발전과 의학, 유전학의 발전 등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불행하게도 현재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왠 간한 발견으로는 누구의 관심도 끌 수 없다. 모두가 인정하는 수준의 업적을 이루어내려면 예전 사회보다 오랜 시간의 '몰입', 즉 공부와 연구가 필요한데, 인간의 수명을 늘림으로써 그것이 가능케되었다. 이제 인간은 예전 인간보다 더 오랫동안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열등감은 인간의 생존을 존속시키기 위해 탄생한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심리학에서 말하듯 많은 이들의 삶이 언제나 인정과 사랑에 굶주리고 불행할지 몰라도, 철학에서부터, 수학, 과학을 발전시키고, 기계를 만들어내고, 아인슈타인, 프로이트, 일론 머스크 등 사람들이 따라 하고 싶은 '우상'적인 존재를 만들었다.

 

'우상'이라면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동시에 비판받으면서 그만큼 격동의 성장과정을 겪으며 빠르게 열등감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아실현의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그들만의 것은 아니라고 믿는다. 지적으로 게으르지 않은 부모가 두꺼운 교육학 책으로 무장하고 자녀에게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적절하게 개입한다면, 아놀드 파마가 말하던 '자신감'과 '결핍'이 동시에 충족되는 성장적인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결핍'이 꼭 열등감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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