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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안 린에서 안두인 린으로...

by 노엄Jr. 2020. 2. 18.

 

오늘은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한다. 미리 양해를 구한다.

 

어렸을 적 난 소설이나 게임 캐릭터에 잘 빠져드는 일이 없었다. 그냥 검과 갑옷, 그래고 드래건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워크래프트2는 내가 직접 구입한 두 번째 게임이었고 알레리아, 튜랄리온, 그롬, 줄진 등 개성 있는 캐릭터들로 넘쳐났지만, 당시 10살이었던 나는 캐릭터들의 강함 이외의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로부터 15년 후...

 

 

지루했다... 바닐라나 불타는 성전보다 느릿느릿하고 할 일은 많은데 재미는 없었다. 하지만 뭔가... 뭔가가 달랐다. 스토리에 전혀 관심이 없던 내가 내가 스토리를 읽기 시작했다. 전과는 달리 엄청나게 많은 캐릭터들의 내면 묘사가 느껴졌다. 악마를 제외한 악을 행하는 무리는 항상 그만큼의 사연을 갖고 있었으며,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벌어지는 전쟁의 비극과 그로 인한 캐릭터들의 원통함이 사무러치게 느껴졌다. 워크래프트 세계관에서 항상 일어나던 전쟁이 이번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노장 바로크 사울팽과 그의 손에 죽은 아들 드라노쉬 사울팽

게임의 보스를 쓰러뜨린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통쾌하고 성취감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온갖 정신을 집중하여 보스전에 임했지만 레이드 성공 후의 통쾌함이 없었다. 전리품을 획득할 때는 마치 소중한 사람의 시체를 뒤지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아서스의 최후. 너만은 예토전생해도 용서해주마...

 

스톰윈드 성안에는 웬 산적 아저씨가 서있었다. 맨날 부재중이었던 우리의 왕과의 첫 대면이었다. 긴 머리에 험악한 인상, 그의 풍채는 왕이라는 이미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틀에 박힌 것을 싫어하는 나는 단숨에 우리 국왕님께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국왕 바리안 린. 처음엔 체게바라형이 갑옷입고 서있는 줄 알았다.

바리안의 이야기는 몇 년 뒤 판다리아의 안개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생긴 것처럼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호전적인 성격의 국왕님은 나에게 맨주먹 파이팅을 요구하고 그것밖에 못하냐며 호탕한 인신공격을 시전 하기도 했다. 강력하지만 나름 계산적인 다른 명장들과는 다르게, 인간 바리안은 그롬 헬스크림 마저 뛰어넘는 막무가내를 보여줬다. 마치 공포 본능이 마비된 사람 같았다. 나는 과거 영웅들의 자신의 공포를 억누르고 용기를 발휘하는 용맹함에 공감을 하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 비현실적인 캐릭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바리안은 달랐다. 그는 매우 인간적이고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공포 본능이 강한 사람이 그것을 억누르고 용기를 보여준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공포 본능이 강한 사람들은 위험에 처했을 때, 몸부림치기보다는 도망가거나, 그것도 못하고 몸이 얼어붙는다. 살아남을 승산이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것과 맞서 싸우려면 뇌에서 공포 본능을 자극하는 부분이 작아야 한다. 이 부분이 큰 사람은 절대로 무모한 싸움을 하지 않는다.

 

바리안에겐 안두인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워크래프트 세계관에서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이야기가 이렇게까지 디테일하게 묘사된 것은 처음이다. 대부분의 영웅들은 부모가 없이 자라거나, 이미 성장한 상태로 스토리에 등장했다. 어느 날 아들이 탄 판다리아로 가던 배가 실종이 되고, 평소에도 아들을 과보호하는 성향이었던 바리안은 아들이 탄 배를 찾으려고 나라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는 호들갑까지 떤다.

 

그의 불같은 성격은 자주 과격한 언변으로 표출되었고, 그의 폭언은 한때 길니아스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일도 있었다. 타 연합을 적으로 돌리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라이언스의 영웅들은 자신의 자존심과 불안을 뒤로하고 바리안의 속내를 알아주는 대인배의 끝판왕을 보여주었으며, 끝내는 바리안을 지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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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니아스가 얼라이언스로 복귀하는 과정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소설 《늑대의 심장》에서는 길니아스인들의 얼라이언스 복귀를 논하기 위해서 모든 종족 수장들이 모였을 때, 다른 종족 수장들이 별다른 이의가 없었던 반면 스톰윈드 국왕 바리안 린이 "로데론 스컬지에게 쑥대밭이 될 때 방관한 놈들을 얼라이언스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길니아스인들에게 집없는 개라는 폭언을 서슴치 않는 바람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말퓨리온의 계책으로 사냥터에서 마주친 바리안과 경쟁하다가 거대한 곰을 함께 잡는데, 겐 역시 바리안의 쌀쌀맞은 태도에 크게 좌절하면서도 그에게서 골드린의 오라가 느껴지는 걸 의아하게 여긴다. 사냥 내내 말다툼을 하다가도 어느새 바리안과 함께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심정을 공유하고, 자신을 다잡고 싶다는 바리안의 요청으로 자신들이 치르는 의식에 그를 참여시키고, 함께 가로쉬의 군대에 역습을 가하여 호드를 잿빛 골짜기에서 쫓아낸다. 바리안은 길니아스 망명자들에게 폭언한 것을 사과하고 다시 한번 길니아스의 얼라이언스 복귀 여부를 안건으로 올리는데, 만장일치로 찬성이 나와서 길니아스의 재가입이 이뤄졌다. 참고로 《늑대의 심장》의 시간대는 늑인 플레이어가 다르나서스에 막 도착하고부터 어둠의 해안 퀘스트가 끝나고 잿빛 골짜기로 넘어가기 직전까지에 해당한다. 즉, 길니아스가 공식적으로 얼라이언스에 복귀한 것은 늑인 플레이어 기준으로 플레이어가 잿빛 골짜기에 진입한 이후부터인 것이다. 은빛소나무 숲의 호드 퀘스트에 등장하는 얼라이언스 지원군도 이 소설이 끝난 시간대에 온 것으로 보인다.

길니아스가 얼라이언스로 복귀하는 과정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다. 소설 《늑대의 심장》에서는 길니아스인들의 얼라이언스 복귀를 논하기 위해서 모든 종족 수장들이 모였을 때, 다른 종족 수장들이 별다른 이의가 없었던 반면 스톰윈드 국왕 바리안 린이 "로데론 스컬지에게 쑥대밭이 될 때 방관한 놈들을 얼라이언스의 일원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길니아스인들에게 집없는 개라는 폭언을 서슴치 않는 바람에 마음고생을 심하게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가 말퓨리온의 계책으로 사냥터에서 마주친 바리안과 경쟁하다가 거대한 곰을 함께 잡는데, 겐 역시 바리안의 쌀쌀맞은 태도에 크게 좌절하면서도 그에게서 골드린의 오라가 느껴지는 걸 의아하게 여긴다. 사냥 내내 말다툼을 하다가도 어느새 바리안과 함께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의 심정을 공유하고, 자신을 다잡고 싶다는 바리안의 요청으로 자신들이 치르는 의식에 그를 참여시키고, 함께 가로쉬의 군대에 역습을 가하여 호드를 잿빛 골짜기에서 쫓아낸다. 바리안은 길니아스 망명자들에게 폭언한 것을 사과하고 다시 한번 길니아스의 얼라이언스 복귀 여부를 안건으로 올리는데, 만장일치로 찬성이 나와서 길니아스의 재가입이 이뤄졌다. 참고로 《늑대의 심장》의 시간대는 늑인 플레이어가 다르나서스에 막 도착하고부터 어둠의 해안 퀘스트가 끝나고 잿빛 골짜기로 넘어가기 직전까지에 해당한다. 즉, 길니아스가 공식적으로 얼라이언스에 복귀한 것은 늑인 플레이어 기준으로 플레이어가 잿빛 골짜기에 진입한 이후부터인 것이다. 은빛소나무 숲의 호드 퀘스트에 등장하는 얼라이언스 지원군도 이 소설이 끝난 시간대에 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길니아스의 왕, 겐 그레이메인은 바리안의 오른팔이 된다. 바리안이 가지지 못한 겐의 공포 본능은 그 누구보다 빠질 타이밍을 재는데 능숙했으며, 싸움의 승산을 계산하는 데 있어 탁월하였다. 겐은 얼라이언스의 보수진영 담당함으로써 철두철미하게 모두의 안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바리안의 무모함을 항상 버거워하긴 했지만 항상 바리안의 진심을 먼저 이해해줌으로써 서로 안정적인 관계를 맺어가게 된다.


바리안의 감정적(인간적)이고 물불을 안 가지는 성격, 그리고 느리지만 꾸준한 성장, 이것은 진보성향의 특징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을 갖고 있는 미성숙한 사람의 결점이 현실적으로 묘사되어 사람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그리고 바리안을 주변에서 도와주는 보수성향의 캐릭터들은 정말 보수의 이상향이라고 할 만큼 엄청나게 성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성숙하지 못한 보수성향의 캐릭터들은 과거 로데론의 대신들처럼 비겁한 배신자반대하기 위해 반대하는 고집불통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아마 이 이야기는 작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에서 벌여지는 로맨틱한 전쟁 이야기이다. 여기서 이 이야기를 쓴 작가가 진보성향이라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바리안의 아들 안두인은, 아버지보다 한술 더 뜬 이상주의자였다. 아버지의 의도치 않게 적을 만드는 성격을 경계했으며, 이 세상은 무엇보다 사람을 믿고 사랑으로 연합되야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눈곱만큼도 없는 공포 본능은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그의 분노는 이어받지 않았다. 아버지의 과보호 속에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고, 힘을 단련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치유하는 법을 공부하였다. 안두인을 돌보는 주변 캐릭터들은 이를 한없이 무르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대주교 베네딕투스의 본질을 느낌적인 느낌만으로 꿰뚫는 등, 안두인은 항상 주변의 예상을 뛰어넘는 판단력과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아버지가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분노가 앞선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바리안은 미국의 Gen X, 안두인은 Millennials의 이상주의자의 성향을 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아들의 반항과 꼬장,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 일로 츠지가 말하던 왕의 참된 무기인 '참을성'을 손에 넣은 바리안은 자신의 아들이 물러 터진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나은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배움으로써 진정한 왕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된다.

 

예전에는 힘이 곧 통솔이라 생각했지. 하지만 이제 알겠다. 통솔이란 조금씩 주고받는 것이며, 사람을 단결시키는 것이야. 잔가지도 한데 묶으면 쉽게 부러지지 않거든.

 

이렇게 참된 왕이 되려는 찰나 불타는 군단의 습격이 시작되고... 그는 그의 성격대로 가망이 없는 무모한 최후의 전투 후 사망한다. 이때 그는 "얼라이언스를 위하여!"가 아닌 "아제로스를 위하여!"를 외치는데, 그가 플레이어와 함께해온 그동안의 성장을 보여주는 상징적 의미로 볼 수 있다.

 


사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사회이슈를 그대로 워크래프트 세계관에 입혀놓은 것만 같다. 인류는 이런 식으로 통합될 수 있다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려고 많은 노력을 한 것이 보인다. 그리고 최근 실바나스의 이야기를 보면 현재까지도 미국의 최신 사회이슈를 그대로 게임 스토리에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많은 혹평을 받는 실정이지만, 미국에서는 혹평보다 호평이 많다. 판타지 세계관에 심취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현실과 사회 이슈를 공유함으로써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이다. 미국 사람들은 언제든지 될 수 있으면 긍정적으로 사안을 받아들이도록 훈련받아왔는데, 이런 전반적 사회 분위기가 모든 것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온라인 포럼 활동을 하는 일부 사람들 제외. 미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벽을 둔다.)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는 있지만 한국의 사회이슈도 근본적으로는 미국과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바리안의 불같고 적을 만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무모한 성격은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슷하고, 안두인의 자상하고 화합과 연대를 무엇보다 중요하시는 성격은 문재인 대통령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겐 그레이메인과 같이 성숙한 보수세력도 제이나 프라우드무어와 같은 강력한 지지기반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항상 국가가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을 더 경계해야 하는 상황을 바리안 왕권과 비교해보면, 우리 사회의 미숙함이 좀 더 직관적으로 보인다.

 

내가 만난 미국 친구들은 밀레니얼 세대의 아이들이고, 대부분 안두인과 같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인 부머세대의 사람들 중 일부는 밀레니얼 세대를 보고 '성장하지 않으려고하는 어린아이들'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그 성장하지 않으려고 하는 어린아이를 보고 진정한 왕이 되는 방법을 배운 우리 국왕님은 뭐가 되는가...?


바리안은 현재 야생과도 같은 험난한 전문화시대에서 자신의 전문기술을 갈고닦는 장인과 같은 면모를, 안두인은 전문화 시대의 폐해로 인해 위태로워진 사람 사이의 공감능력을 갈고닦는 학자와 같은 면모를 보여준다.

 

사람은 나이에 상관없이 서로 다른 배경에서 다른 경험을 하며 다르게 성장해간다. 본인과 다른 부분의 성장이 본인 눈에 안 보인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무르고 못나 보이는 사람에게도 자신보다 뛰어난 부분이 있다. 우리가 서로 다르고, 서로 배우려는 의지가 있는 이상, 우리는 무한한 성장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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