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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l Stories

내 친한 친구가 통일교 신자?

by 노엄Jr. 2020. 2. 17.

 

나는 9학년(한국의 중3)부터 미국에서 자랐다.

그리고 10학년 때 뉴저지에 있는 Bergen Catholic High School이라는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 보면 뭔가 작다

나의 고등학교는 이름과 같이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을 믿는 학교였다. 몇몇 신부님들이 계셨는데, 각각 물리학과 컴퓨터 코딩, 종교를 가르치셨다. 하지만 이런 학교에 다닌다고 해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개방적이고 틈만 나면 신부님들 놀리기에 급급했다. 기본적으로 수업 중에는 끈끈이(던지면 벽에 붙는 장난감)가 날아다녔으며, 어느 날은 끈끈이가 아닌 탱탱볼이 등장하여 반 아이들 전부가 하나로 뭉쳐 선생님을 괴롭히기 위해 평소에 보여주지 않는 끈끈한 연계 플레이를 보여준 적도 있다. 탱탱볼이 나에게 튕겨져 오면 나는 그걸 잡아서 선생님한테 던져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 후 단체로 학교에 남아 보충수업을 들어야했다.

 

하지만 여기는 남학교였다. 미인 여선생이 가르치던 문학시간에는 그 누구도 장난을 치지 않았다. 그리고 Gym(체육) 시간마다 아이들은 농구장에 앉아 여긴 여자도 없는 게이 스쿨이라며 한탄을 하였다. 친구 월시(Walsh)의 그 한없이 서운한 표정은 아직도 생생할 정도로 기억이 난다. 친구들은 Gym시간 때마다 하루빨리 이 땀냄새나는 게이 지옥에서 벋어나기만을 원했다.

 

나는 말 수가 적은 전형적인 동양인 유학생이었다. 그리고 내 주변에 앉아있던 아이들은 쉴 새 없이 나에게 말을 걸고 틈만 나면 칭찬해주기 바빴다. 그리고 내가 과한 칭찬에 쑥스러워서 고개를 못 들면, 친구들은 나에게 칭찬은 당당하게 Take(받다)하는 것이라며 어깨를 펴기를 요구했다. 이런 문화 속에서 나는, 먼저 말을 걸지 못하는 성격이라도 충분히 대화에 참여할 수 있었고, 같이 웃을 수 있었다.

 

몇몇 말수가 적은 우등생과 소극적 성격의 Nerd(오타쿠)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서로 오지게 말이 많았다. 복잡한 가정사나 인간관계, 정치, 음담패설 등 숨기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란 정말 말로 설명하기도 힘든 어둡고 복잡한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쉴 새 없는 말로 아이들은 서로의 겉모습이 아닌 서로의 정신의 만남을 이루며 유대감을 쌓아갔다.

 

이때 나는 내가 한국에서 자랄 때 느낀 것과 사뭇 다른 새로운 감정을 느꼈다. 나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한국에서 다녔지만 한국의 아이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로에게 관심을 주는 방법도 몰랐고, 받은 적도 없었다. 같이 PC방을 가서 같은 게임을 하며 동료의식을 느꼈지만, 미국에서의 그것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었다. 나에 대해서 알아가려는 친구들의 쉴 새 없는 질문은 무언가 꺼지지 않는 따스함을 주었다. 지금은 당당하게 이 감정을 소속감이나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지만, 그 당시 나는 이게 뭔지 몰랐다. 

 

나는 부활동으로 미술을 했다. 부활동에서 나는 야마다 켄고라는 미국인/일본인 혼혈인 친구를 만나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에 오지게 관심이 많던 나는 이 친구랑 친해지려 노력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친구는 일본어는커녕 일본문화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계기로 나는 계속 이 친구와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켄고에게는 주변을 모두 온화하게 만드는 오오라 같은 것이 있었다. 그의 특유의 온화한 말투와 성격은 누구나가 그 친구를 보기만 하면 미소 짓게 만들었다. 내가 처음 보는 타입의 인간이었다. 아직도 나는 켄고의 화난 얼굴을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어느 날 켄고는 자신의 종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ID카드(신분증) 비슷한 것을 보여주며 자신의 가족은 모두 Church of Unification이라는 교회를 다닌다고 미술부 모두에게 얘기해주었다. 그리고 예쁜 여자아이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아이가 교회에서 정해준 미래의 와이프라고 자랑하였다. 나와 친구들은 켄고에게 혹시 여자가 안 이뻤으면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은 있냐고 물었다. 켄고는 웃으며, 자신의 형은 교회가 정해준 미래의 와이프가 마음에 안 든다며 결혼을 거부하였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나와 친구들, 그리고 여자가 고팠던 우리의 미술 선생님 디트리(Ditre)는 켄고의 미래의 와이프 사진을 보며 오 마이 갓을 연발함과 동시에 너네 교회가 우리 성당보다 낫다며 감탄을 표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Church of Unification이 통일교라는 것을 알게 된다. 통일교라 하면 당시 한국에서 사이비로 유명세를 떨치던 종교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공포와 기피의 대상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부처님도 울고 도망갈 것 같은 온화한 캐릭터였던 켄고를 공포와 기피의 대상으로 봐야 할까? 나의 선입견과 켄고의 인품은 전혀 매칭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한국 같으면 대놓고 이야기도 못할 말을 선생님을 포함한 모든 아이들에게 얘기하다니? 미국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다. 정식으로 인정받지 않은 종교가 어떠한 것인지는 모두 알고 있다. 나는 일단 나의 선입견을 뒤로하였다. 하지만 내 안에 계속 도사리던 선입견은 호기심을 불렀고, 켄고를 더욱더 세심하게 관찰하도록 만들었다.

 

 

Bergen Catholic의 Cafeteria 사진은 아니지만 대략 이렇게 생겼다

우리 학교는 점심을 Cafeteria에서 돈을 주고 사 먹었다. 이 돈을 우린 Lunch money(점심값)이라고 불렀다. 피자 한 조각은 1불, 감자튀김은 1.5불, 필리치즈스테이크는 2불 정도로 가격은 매우 저렴했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나와보면 알겠지만 온갖 재밌는 일은 점심시간 때 일어난다. 점심시간을 감시하는 선생님들 입장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 고역이었을 것 같다. 거의 통제불능인 야만적인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 불안한 시간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재미있었다. 서로 Put down(우스꽝 거리로 만들기)하고 부모님 안부를 묻는 게 일상다반사였지만, 한국의 점심시간처럼 쉽게 자존심 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일단 주먹을 들려면 굉장한 각오가 필요했다. 누군가 때린다는 것은 경찰서에 가는 것은 기본이고 재수 없으면 정학 6개월을 감수해야 하는 매우 귀찮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등학교를 다니던 4년 동안 한 번도 싸움이 일어난 적을 본 적이 없다. (내가 재수 없는 유태인 새끼 때린 거 빼면)

 

하지만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적대시하는 행위에서 조금이라도 인종차별이나 빈부차별 등 사람을 구별 짓는 행위가 드러나면 그것은 주먹이 오고 간 것보다 더한 처벌을 받았다. 또한 이러한 차별에 당했다는 사실은 차별 가해자에게의 폭력마저도 상당 부분 정당화시켰다. (이거 덕분에 내가 유태인 새끼 때린 건 처벌받지 않았다)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는 서로 제아무리 놀리고 시비를 걸더라도, 분명한 한계가 존재했다. 그리고 누군가가 이러한 선을 넘는 행동을 보일 시 평소와는 다른 엄청나게 따가운 주변의 시선과 적대감을 한 몸에 받아야 했다. 서로 맨날 놀리고 툭툭치고 시비 걸고 하는 것과, 그 이상의 무언가의 차이는 이렇게도 분명했다. 하지만 한국에 이러한 구분은 없었다. 빈곤 가정집 아이들은 부유한 집 아이들을 구분 짓고 증오했으며, 부유한 집 아이들은 빈곤 가정집 아이들을 더럽다며 괴롭혔다. 아마 미국에서는 둘 다 최소 정학 감이다.

 

나와 항상 티격태격하던 슈나이더라는 덩치 큰 백인 친구가 있었다. 하루는 슈나이더와 락커 앞에서 또 티격태격하고 있는데, 이 놈이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오인한 내 친한 미술부 친구 앤토니가 '한 번만 더 이 딴짓을 하면 니 엉덩이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라며 내가 처음 보는 살벌한 인상과 말투로 협박한 적이 있다. 우리 둘 다 무서워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순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후부터 락커룸 앞에서 우린 티격태격조차 안 하게 됐다. 이렇게 내성적인 아시아인으로서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권력 그 자체였다. 나와 백인 친구들과 트러블이 있으면 무조건 백인 친구들만 온갖 죄를 다 뒤집어썼다. 지금 생각하면 불쌍하다.

 

이러한 경험 때문인지 미국의 인종차별을 걱정하는 아시아권 사람들을 보면 뭔가... 답답한 마음이 앞선다. 물론 미국에서 사회에 나오면 차별을 겪을 때도 있지만, 차별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지, 개인적인 원한이 있지 않는 이상 한 특정 그룹을 차별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리고 백인들보다 다른 민족(+유태인)이 차별을 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법적 문제나 큰 사건에 휘말리게 되면 모르겠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는 오히려 더 유리한 경우도 많다.

 

아무튼 점심시간 이야기로 돌아와서... 점심시간 때 항상 Lunch money를 삥 뜯고 다니는 양아치 새끼가 있었다. 이름도 모른다. 이 친구도 백인이라 그런지 백인 친구들한테는 돈을 빌려달라 요구했지만(말이 빌려달라는 거지 달라는 것이었다) 아시아인만 앉아있는 우리 테이블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켄고는 그 아이를 불러 얼마가 필요한지 물어본 후 돈을 빌려주었다.

 

켄고는 매일매일 양아치에게 돈을 빌려주었다. 총 얼마 빌려줬는지 기억도 안 날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하루는 나를 포함한 다른 아이들이 대체 왜 저런 놈한테 돈을 빌려주는지 물었다. 그리고 켄고는 답했다.


"나는 저 아이가 정확히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모른다. 실제 가정형편이 어려워 돈이 없을 수도 있고, 부모나 새 부모와 트러블이 있어서 용돈을 못 받는 상황일 수도 있고, 그냥 삥을 뜯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의심하고 판단(judge)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고 God(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철없던 나는 이때 켄고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냥 God이 등장했으니 뭔가 종교적인 것이구나라고 밖에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이 말은 한번 들은 것만으로 내 뇌리에 박혔고, 이 기억이 추후 내가 내 선입견들을 마주할 때 판단을 하는 중대한 기준이 될지 이때는 몰랐다.

 

몇 달 후 양아치는 어느샌가부터 켄고가 부를 때 뭔가 주춤거리며 오지 않기 시작했다. 몇몇 날은 켄고에게 돈을 빌려가긴 했지만 무언가 굉장히 미안하고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양아치의 미안한 표정은 날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그리고 일 년 후... 점심을 먹고 있던 켄고에게 양아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Cafeteria의 모두에게 들릴만큼 큰소리로 선언하다시피 이야기를 꺼냈다.

 

"켄고... 내가 여태껏 빌려간 돈 다 갚아줄게. 다른 애들 돈은 안 갚아도 내가 너의 돈은 끝까지 다 갚을게."

 

주변의 백인 친구들이 웅성거리며 이상한 눈으로 양아치를 쳐다봤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몇몇은 대수롭지 않게 식사를 계속했으며, '몇몇은 저놈이 뭐 말뿐이지 실제로 갚겠어?'라며 의심 어린 말들을 쏟아냈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양아치의 평판이 거의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좋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애들은 하루 평균 50센트로 계산해서 여태껏 양아치가 빌려간 돈을 계산하기도 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양아치가 빌려간 돈은 약 120불이라고 하였다.

 

며칠 뒤... 양아치가 켄고에게 꼬질꼬질한 지폐 두장을 주었다. 50불짜리 1장과 10불짜리 1장이었다. 그리고 다 못 갚아서 미안하다며 자존심이 상한듯한 표정으로 눈물을 글썽였다. 켄고는 양아치를 안아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날 이후로부터 주변 아이들은 양아치의 실제 가정형편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불쌍한 아이다, ' '새엄마가 이상한 사람'이라더라 등등 루머인지 아닌지 구분도 안 되는 얘기들로 넘쳐났다. 하지만 확실한 건, 아이들이 양아치를 부정적인 속어(jerk, douchebag, asshole 등등)가 아닌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나에게 엄청난 문화 컬처 충격을 안겨주었다. 통일교에 대한 안 좋은 선입견이 산산조각 났고 이때부터 나의 성향은 불변론자(entity theorist)에서 가변론자(incremental theorist)로 바뀌었다. 누가 만약 나에게 켄고에 대해 '그는 통일교이니 그 선한 가면 뒤의 본모습에 주의하라'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를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나는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을 귀에 못 박히게 들었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본의 아니게 한 사람이 바뀌어가는 과정, 원인, 결과를 밀접하게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접했고, 이 경험은 많은 사람의 이야기, 즉 보편적 다수의 이야기가 틀릴 수도 있고, 항상 생각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한국에서의 유치원, 국민학교, 중학교에 걸친 유년기 생활은 대체적으로 불안했던 마음이 강했다. 항상 소외감을 느꼈으며 이 세상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언제 당할지 모른다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반해 미국에서의 생활은 이 세상은 그렇게 차갑고 위험한 곳이 아니라는 따뜻함과 안심감을 주었다.

 

나는 나 자신이 왜 이렇게 느꼈는지 굉장히 궁금했다. 그리고 이 궁금증은 추후 내가 철학과 사회과학 등 인문학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대략적인 궁금증을 여러 학문을 통해 해결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당시 켄고와 같이 주변을 따뜻하게 안심시켜주는 만드는 방법을 익히지는 못했다.


그 당시 내 주변 친구들의 나를 향한 수많은 관심은, 그들이 노력한 것이 아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 당시 켄고가 양아치와 주변 아이들에게 베푼 관용은, 그가 노력한 것이 아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오랜 세월 동안 나는 왜 한국에는 solidarity(연대), sympathy(공감), community(공동체 의식), mutual support(상호 협조), mutual aid(상호 지원)가 전혀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미국의 내 친구들을 키운 부모와 조부모들은 이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아주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때로는 다수에 맞서고 때로는 피도 흘리고, 심지어 대통령으로 인해 자신의 조국인 미국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것이 내가 단편적으로 봐온 것처럼 노력이 필요 없는 자연스러운 것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것이 아직 자연스러운 것이 아닌 사회라면, 그 사회의 구원성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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