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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Science/촘스키

왜 아나키스트 사상들은 사회에 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까?

by 노엄Jr. 2020. 2. 19.

 


질문자의 질문

 

 

Just been working on Berkman's book now and then and just AK Press republished it, what is Anarchism. Reading these letters in the 20s, one is working on the book and is finding it very difficult. One of the things that he's trying to come to grips with, I think in the book, is why haven't people come to this idea? This idea which to me is just common sense, it's just this natural instinct almost, to solidarity and support?

I've seen Russia, I've seen totalitarianism in action. Why haven't anarchist ideas had a greater impact in the world, I think he's talking about... Now that's 80 years ago nearly and the question we're also facing as people. At least believe what Emma Goldman says, anarchism is the only belief that shows men and women, their ture self, who they can be. We see that we know that instinctively yet it's still had such a minuscule impact. Is that true or is it...?

 

최근 제가 작업하던 버크먼(Alexander Berkman)의 "What is Anarchism"이 AK Press에 의해 재출판되었습니다.  20년대에 쓰인 이 글을 읽으면서 느낀 건데, 왜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이 사상을 깨우치지 못한 걸까요? 책에 쓰인 사상은 저에게 아주 상식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연대와 지지(solidarity and support)는 거의 인간의 자연 본능 수준으로요.

나는 러시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전체주의가 실제로 지배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80년 전에 아나키스트 사상이 세상에 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최소 엠마 골드만이 말하던 아나키즘만이 남성과 여성의 진정한 모습을 보게 해 주는 유일한 사상이라는 믿음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지금까지도 너무 미미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제 말이 맞나요 박사님?

 

 

 

 


촘스키의 대답

 

I don't think it's true that it's had a minuscule impact. A lot of the progressive social change of the past century isn't anarchist. Progressive taxation isn't anarchist. Social security isn't anarchist. But it's a reflection of attitudes and understanding which if they go a little bit further do reflect anarchist commitment. They are based on the idea that they really should be solidarity, sympathy, community, mutual support, mutual aid, and so on and so forth and opportunities for creative action and they were based on these. They're subdued and channeled and modified so they don't take real libertarian forms, but they're there and they lead the social change. Why hasn't it going further?

 

나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난 세기의 진보적 사회변화는 아나키즘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지는 않았죠. *누진세(Progressive taxation)는 아나키즘이 아닙니다. *사회 보장(Social secutiry)도 아나키즘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아나키즘 사상의 이해를 반영한 것들이고, 궁극적으로는 아나키즘으로 가는 걸음마입니다. 우리가 이루어낸 사회변화는 연대, 동정, 공동체, 상호 협조, 상호 지원 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아나키즘 사상에 기반한 것이며, 또한 아나키즘이 지향하는 독창적인 정책을 위한 기회도 생겼습니다. 이 변화의 시도들은 억압되고 왜곡되어서 진정한 자유주의적 형태를 띠고 있지는 않지만,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고, 아직도 사회 변화를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왜 더 빠르게 나아가지 못했을까요?

 

*누진세(Progressive tax)는 소득금액이 커질수록 높은 세율을 적용하도록 정한 세금. 즉 과세물건의 수량이나 화폐액이 증가함에 따라 점차 높은 세율이 적용되는 조세를 말한다. 누진제는 개인세 또는 연간 세금 체계에 적용이 된다. 누진세는 조세부담의 귀착(Tax incidence)을 낮추기 위해서 도입됐다. 즉, 세금을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에게 낮은 세금을 메기고, 세금을 많이 낼 수 있는 사람에게 많은 세금을 부과한다. 누진세의 반대 개념이 역진세(Regressive tax)이다.

 

누진세는 주로 소득적용이 된다. 고소득자에게는 높은 세율을 적용하고, 저소득자에게는 낮은 세율을 적용하는 것이다. 누진세의 개념은 다양한 이념에 걸쳐있는 경제학자 및 정치학자들의 지지를 받아왔다. 이는 처음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언급되었다. 스미스는 교통 체제에 누진세를 부과하자고 주장하였다. 이후 카를 마르크스 또한 공산당 선언에서 누진세를 지지하였다.

*사회 보장(Social security)이란 이미 19세기의 단계에 있어서 성립을 본 사회 보장 형태에서 찾아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노동자 계급의 임금에 대한 실질적인 보조·확충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전 국민의 개인 소득을 재분배에 의해서 일정 한도 이상으로 보장하고 최저 한도의 생활을 확보케 하기 위한 제도상의 모든 체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것을 사회적 권리로서 확인하고, 노동자 계급 및 국민 전체에, 그 사람이 일을 하고 있을 경우나 또는 일을 하지 않고 있을 경우를 막론하고 차별을 두지 않은 채 필요에 따라서 각자의 생활을 보장하고 또한 예방 조치를 강구하기 위한 제도라고 할 수 있다.

 

1935년, 미국이 「사회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을 제정하면서 법률용어로 처음 사용되었고, 이후 전세계적으로 통용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 보장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던 사회 보장과 구빈 제도(救貧制度)를 기초로 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전후를 계기로 전적으로 새로운 제도적 체계로 재편(再編)되고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A large part of it is violence like Berkman's experience in Russia. He entered into a violent totalitarian state. Up until the Bolshevik take over, the coup, revolution revolution. Up until that, there were very significant popular libertarian, sometimes anarchist initiatives all over. Running from peasant anarchism in Ukraine to workers councils with Soviets and so on and so forth. They were simply smashed by force by great violence.

 

가장 큰 이유는 폭력입니다. *버크먼이 러시아에서 경험한 것처럼 말이죠. 그 당시 러시아는 폭력적인 전체주의 국가였습니다. *볼셰비키가 쿠데타 혁명으로 정권을 탈취하기 전까지는 매우 많은 자유주의적, 때로는 아나키즘적 움직임 여기저기서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농민 아나키즘(Peasant anarchism)에서 *소련의 노동자 협의회(Workers councils with Soviets)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들은 단순히 거대한 폭력에 의해 강제로 박살났죠.

 

*버크먼이 러시아에서 경험한 것

버크먼은 러시아 제국 시절 빌뉴스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때 러시아 수도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퍼져 나가는 급진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881년 폭탄으로 인한 차르 알렉산더 2세의 정치적 암살이 일어났다. 버크먼의 부모가 차르의 죽음이 유대인과 다른 소수 민족을 억압할 수 있다고 걱정하는 동안, 그는 포퓰리즘과 허무주의를 포함한 당시의 급진적인 사상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는 그가 좋아하던 삼촌, 마크 나탄손이 혁명 활동으로 사형을 선고받았을 때 매우 분노했다. 1888년에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여 엠마 골드만과 만난다.

 

*볼셰비키의 쿠데타 혁명

러일전쟁과 2월 혁명 이후 사회주의자들로 주축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민생이 어려워진 원인인 전쟁을 끝내길 바라는 민중들의 열망을 무시한 채, 한계를 드러냄으로써 동시에 경제파탄을 겪자, 민중들의 지지기반을 잃어갔었다.
9월로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시내에서는 볼셰비키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볼셰비키 세력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1917년 11월 7일 오전 10시,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위원장 트로츠키)가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1000명의 적위대를 이끌고 급습함으로써 케렌스키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됐음을 선언했다. 이 혁명은 볼셰비키 혁명이라고 부르는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혁명이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망명지 스위스에서 급거 귀국한 지 6개월여 만의 일이었다.

 

*우크라이나의 농민 아나키즘

우크라이나혁명반역군을 뜻한다. 이는 러시아 내전 당시 유명한 아나키스트 네스토르 마흐노의 지휘 하에 조직된 아나키스트 무장단체이다. 주로 우크라이나 지역의 노동자와 농민들로 구성되었다. 흔히 흑군(Black Army)이라고 한다. 1918년에서 1921년 사이 우크라이나 독립 전쟁 당시 무정부 아나키스트 사회를 형성하려 한 자유지구의 "자유 소비에트" 활동을 수호하는 역할을 했다.

 

*노동자 평의회(Worker's council)는 특정 직장 또는 회사, 예컨대 공장, 학교, 농장과 같은 장소에서 그 직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운영하는, 임시적 가역적 대표위임을 원칙으로 하는 정치경제조직이다.

노동자 평의회 체제 하에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의제가 무엇이고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결정한다. 위임된 대표자는 노동자들 자신들 가운데에서 선출된다. 대표자가 그 권한을 배반했을 경우 즉시 퇴진될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대표자는 자주 교체되는 것을 상정한다. 노동자들을 감독하는 관리자는 따로 없으며, 모든 결정권한과 조직은 대표자 시스템에 달려 있다.

보다 큰 규모로 보면 이렇게 선출된 단일 직장의 대표자들이 보다 상위 평의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대표자를 선출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하다 보면 해당 국가의 해당 산업 전체를 운영하는 최고 대표자까지 올라가게 된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결정 권한은 노동자들 스스로의 의제에 의해 아래로부터 위로 전달된다. 이는 상명하복을 원칙으로 하는 관료제와 정반대 성격을 나타낸다.

소비에트 연방의 "소비에트"는 러시아어로 "평의회"라는 뜻으로, 본래 이러한 노동자 평의회의 일종이었다. 그러나 소련에서는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 공산당 관료제가 평의회를 장악하게 되었고, 국호에 이름을 올린 "소비에트"는 정작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다.

 

 

Lenin and Trotsky were totalitarian extremists, and they had a theory behind it. They were kind of dedicated Marxists who believed that a backward primitive country like Russia can't go to socialsm. Masters principles tell us that and therefore we have to drive the country by force through the stages of essentially state capitalist development, and then ultimately something will happen. They weren't repeating the master accurately. This required suppression of many years of Marx's later work which were literally suppressed. He was studying the peasant societies in Russia and so on and so forth, but that doesn't really matter... They had a conception they used to... they had the force... It wasn't easy like, you know, to destroy Makhno's movement or Kronstadt. Eliminate the Soviets and so on. It wasn't a trivial operation, but it was carried out, and Berkman saw a totalitarian vicious... totalitarian society arising very much the way anarchists had predicted. I mean Bakunin spelled it all out. In fact Trotsky.. before he joined it said it was going to happen as did Rosa Luxembourg and others. But it happened so... and that's their variant... our variant was different. 

 

레닌과 트로츠키는 극단적인 전체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죠. 그들은 러시아와 같은 원시적인 후진국가가 곧바로 사회주의 체제로는 갈 수 없다고 믿는 일종의 헌신적인 마르크스 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주의 향한 첫걸음으로써 러시아를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 강제로 몰아넣었고, 언젠가 그다음 단계로 도약할 날이 올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마르크스의 원칙을 정확하게 따르지는 않았죠. 마르크스가 후반에 남긴 연구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러시아의 농민 사회를 연구하기도 하고 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힘을 이용하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마흐노의 혁명이나 *크론슈타트 반란박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녔죠. 진압에는 엄청난 규모의 군대가 필요했지만 그들은 그것을 수행했습니다. 이때 버크만은 전체주의를 잔인하다고 보았죠. 전체주의 사회는 아나키스트들이 예상한 대로 흘러갔습니다. *바쿠닌이 말한 그대로 되었죠. 사실 트로스키, *로자 룩셈부르크 외 다른 사람들도 이것을 예상했습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사회주의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먼저 국가 자본주의를 택한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로 인한 공급과잉만이 사회주의를 현실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국가자본주의는 항상 사적인 이득보다 혁명과 민중을 생각하던 레닌이 지도자로 있어야만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매우 불안정한 시스템이였다. 결국 레닌이 죽고, 스탈린으로 인해 그들이 꿈꾸던 공산주의의 첫걸음을 내딛기도전에 계기로 몰락하게 된다. 

 

*네스토르 이바노비치 마흐노

10월 혁명 이후 볼셰비키에 협조하기를 거부한 우크라이나의 아나키스트 혁명가이다. 앞서 이야기한 우크라이나 혁명반역군(흑군/Black Army)을 지휘했다.

 

*크론슈타트 반란

1921년 3월 7일, 크론시타트의 수병들이 볼셰비키정권에 대해서, 자유 선거의 보장, 언론·출판의 자유, 정치범의 석방, 개인의 재산의 소유권 등을 요구하며 봉기했다. 당시 붉은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트로츠키는 반란이 볼셰비키 정부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 즉시 크론시타트에 군대를 보내 반란을 진압했다. 이것은 10월 혁명 이후 마지막으로 일어난 반정부 시워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크론시타트 요새는 레닌그라드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요새는 페테르부르크 중심가의 유적들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지구와 관련 기념물군의 일부를 이루어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러시아 출신의 아나키스트 혁명가이자 철학자이다. 바쿠닌에의하여 당시 유럽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던 특정한 혁명적 좌파 세력이 자신을 아나키스트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자각하게 됐고, 이로서 아나키즘은 본격적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바쿠닌을 "아나키즘의 아버지"라 부르기도 한다. 그의 주요 이론은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

폴란드 출신의 독일 마르크스주의, 정치이론가이며 사회주의자, 철학자 또는 혁명가이며, 레닌주의 비판자이다.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SPD)과 이후의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사회 민주주의 이론가였다. 그녀는 신문 〈적기(赤旗)〉를 창간했고 나중에 독일 공산당(KPD)이 된 마르크스주의자 혁명그룹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으로 조직하여 1919년 1월에 베를린에서 혁명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녀의 지도 아래 수행된 혁명은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었고, 룩셈부르크와 수백 명의 혁명군은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되었다.

 

Berkman was writing right after Wilson's red scare which made the Patriot Act look like a Tea Party. It was a violent repression run by the progressives Woodrow Wilson and others and not just affecting anarchists, not just Emma Goldman who was kicked out, but even people pretty much in the mainstream like Eugene Debs leading labor figure. Wilson tossed him into jail because he raised some questions about the nobility of Wilson's war and refused to even grant him amnesty when everyone else was granted amnesty. this is really vindictive and it really crushed independent thought crushed labor had a big effect so it was violence. Alongside the violence there is the rise of massive propaganda. That's the rise of the public relations industry to try to control attitudes and beliefs but quite apart from that there's something quite simple.

 

버크만이 책을 쓴 것은 *애국 운동*티 파티(Tea Party)처럼 보이게 한 *윌슨의 적색 공포 직후였습니다. 적색 공포는 우드로 윌슨과 그 외 진보진영 사람들에 의한 아나키스트들을 노린 폭력적인 억압이었습니다. 이것으로 인해 *엠마 골드만이 국외로 추방되었고 노동계를 이끌던 *유진 데브스는 윌슨의 전쟁의 명분에 대해 의문을 가진 것 때문에 감옥에 갔죠. 다른 사람들이 다 풀려날 때도 그만 풀려나지 못했죠. 이것은 보복성인 게 분명했고, 개인의 생각(표현의 자유)을 박살 냈으며, 노동계 또한 박살 냈습니다. 이것은 아주 폭력적이었고, 모든 것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폭력이 행사됨과 동시에 거대한 프로파간다의 바람이 시작되었죠. 그것은 국민들의 태도와 신념을 통제하려는 홍보 산업의 부상이었고, 이것은 의외로 꽤나 간단했습니다.

 

*애국 운동

여기서 말하는 애국 운동이란 1916, 1917에 일어난 노동자파업을 포함한 수많은 아나키즘 운동

 

*티 파티(Tea Party)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반란의 불씨를 일으키는데 일조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 

 

*윌슨의 적색 공포 / 제1차 적색공포(1917-20)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이후와 제1차 세계대전(1914-18) 중에 시작되었다. 무정부주의자와 좌익의 정치적 폭력과 사회적 불안으로 현존하는 사회적·정치적 긴장이 악화되었다. 보수주의 신문사들은 이러한 정치적 두려움을 (급진적 무정부주의 다수가 대중적 빈곤에 대한 답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외국인 혐오증으로 악화시켰다. 게다가, 세계산업노동자연맹(the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또는 IWW)이 1916, 1917년 몇 번의 노동자파업을 초래했는데 언론은 이를 미국 사회의 급진적 위협이라고 표현했다. 즉, 보수주의 언론사들이 합법적 노동자파업을 “사회에 어긋나는 범죄”나 “정부타도의 음모” 또는 “공산주의 수립 계획”이라고 잘못 전한 것이다. 1918년 토마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탐탁지 않은 정치적 인물들을 강제 추방함으로써 전시의 사기를 지키기 위해 반(反)이민, 반 무정부주의 1918 치안 법을 입법하도록 미의회에 압력을 가했다.적색공포는 미국국민의 전후 사회의 불안요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반응에서 나온 ‘정상’을 향한 일종의 “부흥운동”이며 보수적 지배계층은 미국국민들의 심리적 공허감을 이용해 ‘비미국적 요소’를 가진 모든 개인과 집단들을 새로운 적으로 만들어 이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관용으로 ‘적색공포’를 조장해낸 것이다.

 

*엠마 골드만(Emma Goldman, 1869년 6월 27일 - 1940년 5월 14일)

아나키스트 정치 활동가이자 작가였다. 그녀는 20세기의 전반기에 걸쳐 북미와 유럽의 아나키스트 정치 철학의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골드만은 러시아 제국의 코브노(Kovno)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고 1885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1] 헤이마켓 사건을 계기로 골드만은 아나키즘에 경도 되었고, 아나키즘 철학에 관한 연설가이자 작가가 되었으며, 여성의 권리와 사회 이슈 등에 이야기하며 수많은 군중을 이끌었다. 그녀와 또 다른 아나키스트 작가인 알렉산더 버크먼은 그녀의 연인이자 오랜 친구였는데 1892년에 산업 자본가 헨리 클레이 프릭(Henry Clay Frick)을 행위의 프로파간다로써 암살시도 했었다. 프릭은 암살시도에서 살아남았고, 버크만은 22년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어서 골드만은 폭동 선동과 불법적인 피임 정보 유포 혐의로 몇차례 옥살이를 하게된다. 1906년 골드만은 아나키스트 신문인 Mother Earth를 창립한다.

1917년 골드만과 버크만은 징병 거부를 목적으로 사람들에게 신분등록을 거부할 것을 선동하는 음모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는다. 감옥에서 출소한 이후 다른 248여명의 사람들과 함께 러시아로 추방당한다. 그들은 처음엔 볼셰비키의 10월 혁명을 지지했지만, 크론슈타트 사건이 발생한 이후 그들의 입장을 바꿨으며, 독립적인 목소리를 폭력으로 억누르는 소비에트 정부를 비판했다. 그녀는 러시아를 떠났고, 이 경험을 토대로 1923년에 My Disillusionment in Russia(러시아에서의 나의 환멸) 라는 글을 작성한다. 이후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지에서 거주하는 동안 Living My Life 라는 제목의 자서전을 작성한다. 이 글은 1931년과 1935년에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서 출판되었다. 스페인 내전의 발발 이후 스페인으로 향해서 그곳에서 벌어지는 아나키스트 혁명과 투쟁을 지지했다. 이후 골드만은 1940년 5월 14일, 70세의 나이로 캐나다에서 사망한다.

그녀의 생애동안 골드만은 지지자들에 의해 자유사상가이자 용맹한 여성으로 칭송되었으며, 비판자들에게는 정치적 살인과 폭력 혁명의 옹호자로서 비방받았다.

 

*유진 빅터 "진" 데브스(Eugene Victor "Gene" Debs, 1855년 11월 5일 ~ 1926년 10월 20일)

미국의 노동조합 운동가로,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발기인 중 한 명이었고 다섯 차례에 걸쳐 미국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대통령 선거 출마 및 노동운동의 업적으로 인해 데브스는 오늘날까지도 가장 저명한 미국 사회주의자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정치경력 초기 데브스는 민주당원이었고 1884년 인디애나 주의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기관차 화부 및 기관사 형제단을 비롯한 소규모 노조와 함께 일한 뒤 데브스는 미국 최초의 산별노조 중 하나인 전미철도노조(ARU)의 설립에 큰 역할을 했다. 1894년 여름 풀먼팰리스카회사 노동자들이 임금 삭감에 반발하여 살쾡이파업을 일으키자 데브스의 ARU는 풀먼카 회사에서 만드는 철도차량을 사용하지 말라는 보이콧을 전개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풀먼사 파업으로 27개 주의 250,000 명 이상의 노동자가 파업에 참여했다. 당시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육군을 동원해 파업을 탄압했고, ARU 총수로서 데브스는 파업에 대한 법원의 금지명령을 무시한 죄로 6개월간 징역을 살았다.

옥중에서 데브스는 다양한 사회주의 이론서를 독해하고, 출소한 뒤 국제사회주의운동의 지지자가 되었다. 데브스는 1897년 미국 사회민주주의당, 1898년 미국 사회민주당, 1901년 미국 사회당의 창당 당원이었다.

데브스는 5회에 걸쳐 사회주의 후보로서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고,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900년 0.63%, 1904년 2.98%, 1908년 2.83%, 1912년 5.99%, 1920년 3.41%. 마지막 1920년 선거는 옥중출마였다. 또한 1916년에는 고향 인디애나주에서 국회의원 선거에도 출마했다.

데브스는 뛰어난 웅변가였으며,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소요죄법 위반 혐의에 유죄를 선고받고 10년형을 살았다. 대통령 워렌 하딩은 1921년 12월 데브스를 감형해 주었다. 출옥한 데브스는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26년 사망했다. 향년 70세.

 

I mean there are disciplinary effects to the way life is organized. Students today have many are more in some ways... I mean in a lot of ways they're freer when they were 60 years ago. Their attitudes and commitments and so on. On the other hand the more disciplined. They're disciplined by debt. A part of the reason for arranging education so you come out with heavy debt is so you're disciplined or let's take the last 20 years of the neoliberal years, roughly What's called globalization: Neoliberalism. A lot of it is a very striking part of it is just aimed to discipline. It wants to eliminate freedom of choice and impose discipline.

How do you do it? Well if we have a couple in the United States now working, you know Each 50... each of them 50 hours a week to put food on the table. But you don't have time to think about how to become a libertarian socialist. What you're worried about is how do I get food on the table. Yeah, I mean, that guy has kids to take care of, and I got something doing, you know. When they're sick I've got to go to work and what's going to happen to them?, to you know, and that's very. that's well-designed, techniques of imposing discipline. and there are costs to trying to be independent. Just take, say, trying to organize a labor union and if you're the organizer there's going to be cost to you... I mean maybe the workforce will gain but there's cost to you. And we know there is... and we know what the cost is... Not just in energy and effort but just in punishment. And people who are living in fragile circumstances have a reasonable calculation... They say why should I take the cost? I have to get by.

So there are many reasons why normal instincts and attitudes don't come out. But over time they often do. That's why we have social changes to for the better.

 

국민들의 삶에 노예 훈련 효과를 넣기 시작한거죠. *60년 전의 학생들은 많은 면에서 더 자유로웠습니다. 태도나 책무 같은 것들로 말이죠. 지금의 학생들은 전보다 더 노예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학자금 대출 빚으로 말이죠. 지난 신자유주의/국제화의 20년간에 걸쳐 학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대학을 졸업하면 엄청난 빚이 생기게 일부러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정말 훈련 이외의 목적이 없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 부분이죠. 아이들의 선택의 자유를 없애고 여유를 빼앗는거죠.

어떻게 그렇게 하냐고요? 현재 미국에 한 젊은 부부가 먹고 살기 위해 한주에 50시간 일을 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럼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할 여유조차 없겠죠. 걱정거리는 먹을 것에 대한 걱정과 아이들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에 대한 것이 전부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픈데 직장에는 나가야 하고... 그럼 아이들은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하겠죠. 그래요. 이것은 아주 치밀하게 디자인된 노예 훈련이죠. 독립적인 사상을 가지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뤄야합니다. 당신이 노동자 조합을 만드려고 하면 엄청난 부담이 모두 당신에게로 가죠. 당신이 만든 노조에 소속된 조합원들은 이득을 볼수도 있겠지만 당신은 댓가를 치뤄야합니다.  그 댓가는 당연히 당신의 에너지와 노력만이 아니고, 처벌또한 포함될 것입니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은 합리적인 선택을 하죠. 그들은 절대로 자신이 그런 댓가를 치르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하루를 살아야 하죠.

많은 사람들이 인간의 아주 본능적이고 상식적인 사상들을 아직 떠올리지 못한 이유는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생각보다 자주 하나둘씩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더 나은 사회 변화를 지속적으로 겪고 있는 것이겠죠.

 

*60년 전의 학생들 (히피세대)

미국의 1960-1970년대 상황을 살펴보면, 베트남 전쟁 발발과, 존 F. 케네디의 암살, 맬컴 엑스, 마틴 루터 킹 암살, 로스엔젤레스 흑인 폭동등의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이때 미국의 풍경은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절망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으며, 이에 미국의 청년층은 현 상황에 대해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적으로 평화를 사랑하고 자연으로의 회귀를 외쳤고, 도덕과 이성보다는 자유로운 감성을 중시하고, 즐거움을 추구했다. 히피는 '좌파운동', '미국 시민권 운동'과 더불어 1960년대 미국의 대표적인 반문화 운동이다. 1967년경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들은 긴 머리에 맨발이나 샌들을 신고 다녔으며, 다양한 색깔의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또 마리화나나 LSD, 그 밖의 약물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상징이나 사상을 구체화시켰다. 특히 유명한 록 그룹 비틀즈는 노래로써 히피 운동의 확산을 도왔다.

 

*학자금 대출 빚

2019-2020 미국의 대학 등록금은 사립의 경우 평균 4300만원, 주립일 경우 주거주자일 경우 1300만원, 아닐경우 3천만원 정도이다.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 / 자유지상적 사회주의(自由至上的社會主義, Libertarian socialism)

국가에 의한 중앙 집권적 국가 소유화와 경제 통제 그리고 국가마저 거부하는 반권위주의적 정치철학적 그룹을 일컫는다. 이들은 직장에서의 임금 노동 관계를 비판한다. 이들은 대신 노동자 자주경영과 정치 조직의분권화를 강조한다. 이들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권위주의적 기관과 대중을 종속시키는 소유 계급, 정치적, 경제적 엘리트들의 제거를 통해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유지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직접 민주제와 연방주의, 연합 등을 바탕으로 분권화된 구조의 자유지상적 자치주의나 시민 어셈블리 노동 조합, 노동자 평의회 등을 옹호한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삶에서 모든 불합리한 권위를 해체하는 것을 통하여 자유 그리고 자유연합론을 목표로 한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지상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에 모두 반대하며 그들과 구별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들로, 국가사회주의를 반대한다.

과거와 오늘날의 자유지상적 사회주의의 운동들은 일반적으로 아나키즘을 포함(특히 아나르코공산주의, 집산주의적 아나키즘, 아나르코생디칼리슴, 그리고 상호주의 아나키즘)하며, 자율주의, 코뮤널리즘, 참여주의, 길드 사회주의, 혁명적 생디칼리즘 그리고 평의회주의나 룩셈부르크주의같은 자유지상주의적 마르크스주의 등을 포함하며, 몇몇의 공상적 사회주의와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을 포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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