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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Science/촘스키

노암 촘스키 (Noam Chomsky)

by 노엄Jr. 2021. 12. 11.

※ 본 글은 퍼온 글입니다. 본 티스토리에서는 해당 글의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출처: 20세기를 움직인 사상가들 : Guy Sorman 지음, 강위석 옮김, 한국경제신문, 1991, Page 143~154

 

그나마 젊으셨을 때... 지금 왜 그렇게 늙으셨어요... ㅜㅜ

노암 촘스키란 누구인가?

"사람은 말하는 능력을 타고난다" .... 1928 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리아에서 러시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언어에 대한 흥미를 일찍부터 보여 중세 언어학 연구가인 아버지가 편찬한 13 세기 헤브루어 문법을 읽기도 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구조 언어학을 공부한 그는 1957 년 「구문론의 구조 (Syntactic Structures)」라는 책으로 구조 언어학을 주류로 하는 미국의 언어학계에 새 바람을 일으킨 기수가 되었다. 또한 그는 변형생성문법 이론의 창시자로서 어린이가 몇 마디 표층 언어의 물리적 음성만으로 언어의 변형 구조와 심층구조를 습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밝혀내기도 했다. 그가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반인 경험주의를 넘어 데카르트나 훔볼트에게서 철학적 근거를 찾으려고 한 시도는 「데카르트 주의적 언어학 (Cartesian linguistics, 1966)」에 잘 나타나 있다. 1960 년대 뉴레프트 운동의 기수이기도 한 그는 주요 저서로 「미국의 권력과 신관료계급 (American Power and the New Mandarins, 1969)」과 「생성문법의 의미론 (Studies on Semantics in Generative Grammar, 1972)」등이 있다.

 

촘스키 (Noam Chomsky)는 결코 접근하기 쉬운 인물이 아니다. 그는 언어학의 교황이라고 흔히들 알려져 있다. 『나는 결코 교황이 아닙니다.』그는 재치 있게 되받아 넘긴다. 『언어학은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교주가 필요하지 않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습니다.』

어쨌든 이 교황은 낡은 스웨터, 빛이 바랜 블루진 그리고 운동화를 착용하고 있다. 아무리 미국 대학이라지만 60 살난 교수의 차림치고는 좀 괴짜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의 학과 사무실을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건 무슨 임시창고 같은 것이었다. 역설적이라고 느낀 점은 보스턴 교외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현대적인 대학인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바로 중심부에 그의 사무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연구실은 정돈되어 있지 않았다. 벽에는 반핵ㆍ반제국주의ㆍ반 레이건 포스터들이 붙어 있다. 여기에는 적어도 「1968 년 5 월」이 살아 있다. 촘스키의 주변에는 온갖 기묘하고 도깨비 같고 음산한 모든 혁명이 모여 있다. 그중에서도 중심적인 것은 민권 보호, 제3 세계 관련 사항 그리고 평화주의다. 이 포스터들 자체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언어학자들이다. 이들을 전부 합쳐 놓으면 가장 산간벽지의 방언과 문법을 통달한 것이 된다. 거기에는 라틴어도 있고 위구르 (Uighur) 어도 있다. 『만일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의 언어를 보고 싶으면 이곳에 오셔야 할 것입니다.』라고 촘스키는 내게 말한다.

 

내가 매우 놀란 것은 그가 나를 만나겠다고 쾌히 승낙한 점이다. 촘스키야말로 좌파 지성인의 축소도이다. 미국에서의 그는 대단한 좌파에 속한다. 그는 대답한다. 『나는 「피라고 (Figaro)」나 「월스트리트 저널 (Wall Street Journal)」같은 보수계 신문의 언론인들과 만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대체로 그들은 좌파 신문 인사들보다 정직하지요.』그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그는 우파 신문기자들과는 언어학이나 과학 관계 이야기만 나눈다는 것이다. 절대로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단다. 촘스키는 「누벨 옵세르바퇴르 (Nouvelle Observateur)」와는 특별히 앙숙이다. 『경험에서 알게 된 것입니다만 프랑스 언론은 이념적 소속감 때문에 의사소통을 왜곡시키는 정도가 매우 심해서 내가 말한 내용과는 전혀 동떨어진 기사를 싣습니다. 파리의 신문기자는 아주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예외가 있다니 고마운 일이다)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쓰고 내가 실제로 한 말은 아무 의미가 없는 모양이지요. 모스크바 사람들도 이 점에서는 마찬가지예요.』라고 촘스키는 덧붙인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학 문제에만 국한해서 이야기하기로 했다. 이것은 내게는 훨씬 다행스럽게 받아들일 일이었다.

촘스키는 실은 이중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한 사람의 편향적 지식인으로서가 그 하나이고 언어학자로서가 다른 하나이다. 1960 년대말 이래로 촘스키는 핵무기나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 등 모든 좌익 관련 운동과 연계된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나는 좌파라는 딱지를 사양합니다』라고 그는 대답한다. 『나는 언제나 마르크스주의나 레닌주의를 반대해 왔습니다. 나는 유행에 따르지 않고 나 스스로가 사실에 근거를 두고 개별적인 이슈에 대해서 입장을 가집니다.』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촘스키는 1968 년에 하노이를 방문한 자리에서 북베트남은 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자유를 수호하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유럽에서는 촘스키를 무엇보다도 현대 언어학의 창시자로 여기고 있다.


촘스키 혁명

1957 년 아직 채 30 살도 되기 전에 그는 언어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내놓았다. 사회학에서 마르크스가 또 인류학에서 레비스트로스가 차지하는 위치를 촘스키는 언어학에서 차지하고 있다. 촘스키의 말에 따르면 ㅡ 그의 선배들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ㅡ 사람이 말을 하는 것은 사물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 증거로 언어학자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모든 언어에서 일부 특성만이 후천적인 것이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 후천적이 아닌 특성은 물려받은 것으로서 우리가 유전받은 목록에 속한다. 인간은 말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촘스키는 말한다. 언어란 생득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생명 속에 본래부터 싹트고 있는 것이다. 촘스키 혁명 이후로 언어학은 본격적인 과학이 되었으며 언어의 보편적 규칙을 발견하는데 그 목적을 두게 되었다.

 

통상적으로 믿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언어의 가짓수는 무한히 많은 것은 아니라고 촘스키는 설명한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말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말로 할 수도 없습니다.』모든 언어는 단 하나의 보편적 문법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구조는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왜? 그 이유는 인간은 유전에 의하여 상속받은 것으로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물적인 특성은 옛날에 있던 소리를 만들거나 조합시키는 것을 불가능케 합니다. 왜냐하면 언어란 인간의 자연적 진화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예를 들어 보자. 어떤 언어도 음소 [a]가 없으면 음소 [u]와 [i]를 구별하지 못한다. 이때 [a]는 [u]와 [i]에 대한 비교점 (point of comparison) 역할을 하게 된다. 또 다른 예 하나를 들어보자. 많은 종류의 언어 중에서 복수를 표시하는 데는 그 단어에 추가적 음소를 붙인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하는 것은 어떤 언어에도 없다. 인간과 그 밖의 「말하는」 생물종을 진정으로 구별해 주는 것은 인간은 유한한 수단으로써 무한한 수의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이다. 촘스키의 용어를 빌리면 문법은 생식력이다. 문법은 인간의 표현과 이해력의 자유를 만드는 근본이다.


언어학은 인간의 균질함을 증명한다

인간은 그것의 생물학적 구성이 그런 것처럼 언어적 표현에 있어서도 균질하다. 사실 어떤 언어도 배우는 것이 가능하고 번역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어려움은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것은 아니다. 역으로 만약 인간은 인간과는 생물학적으로 전혀 구성이 다른 외계인과 접촉한다 해도 결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말을 통한 의사소통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본질적인 제약 때문이다.

촘스키의 언어학도 레비스트로스가 문화에 관하여 적용한 바 있는 구조주의와 대단히 유사하다. 레비스트로스는 한 문화가 아마존의 원주민이나 현대사회에 속하거나 제한된 개수의 가능한 행동양식의 합계일 뿐이라고 말한다. 만화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기본구조를 빙글빙글 돌림으로써 수많은 양식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촘스키의 견해로는 이러한 원리가 언어에 대해서도 성립된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1950 년대 초에 유전 기호가 발견되면서 한층 더 강화되었다고 그는 덧붙인다. 인간의 유전자가 가진 프로그램 메커니즘을 보고서 그는 언어의 원천은 인간의 유전자 안에 있다고 단언할 수 있게 되었다.

 

분명히 촘스키는 대단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말로는 이것이 대체로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런 경향이 더욱 강하다고 그는 해명한다. 『프랑스의 언어학자 가운데는 상당수가 과학 이전 시대에 속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가 그들의 연구를 걸러내고 있거든요.』그러나 이념적 환상이 과학에 간섭하고 있는 나라는 프랑스만이 아니다.  『소련도 그런 나라입니다.』

 

촘스키 혁명 이전에는 언어학의 해묵은 과제는 언어를 분류하는 일이나 언어의 구성요소를 모아 이것을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오늘날 MIT에서의 언어학은 언어의 표면적 다양성의 이면에 있는 깊은 단일성을 연구하고 있다. 이것을 보편적 문법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촘스키는 바벨탑의 신화를 입증하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닙니다』그의 대답이다.

『보편적 문법이란 것은 옛날 아담과 이브 시대에는 언어가 한 가지밖에 없다가 그 후 여러 가지로 분화되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현대의 언어학은 수학적 모델의 형식을 취하는 일이 매우 잦다. 나는 그에게 이런 방법은 결코 언어학 연구논문이 널리 읽히게 만드는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이 방법이 자기 의견을 대중화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다. 그는 형식 및 수학적 원리는 한 사회과학이 다른 분야와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필요 불가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왜 아이들은 한 시간에 한 단어를 배우는가

최근의 그리고 가장 도발적인 촘스키의 논문에는 아이들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은 어른이 아니라는 주장이 들어 있다. 『아이들은 마치 볼 수 있는 것처럼 또 새가 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말도 할 수 있습니다.』어른이 하는 것은 단지 아이들에게 자극을 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보편적 문법이라는 제약된 틀 안에서 아이에게 어떤 특정한 언어를 향한 방향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노출이 전적으로 결핍될 때만 아이들은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촘스키는 내게 모든 아이들은 말을 이미 알고 있다고 들려준다. 『내가 이에 대한 그 어떤 증명을 당신한테 보일 수는 없습니다. 나는 다만 사실을 말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사실만이 있지요. 증명이라는 것은 수학자나 하는 일입니다.』라고 촘스키는 말하고 있다.

촘스키가 이야기한 또 한 가지 사실은 아이들의 배움의 속도에 관한 것이다. 가장 빠른 속도는 한 시간에 한 단어라고 한다. 아이가 한 개의 단어를 배울 때만 그 아이는 그 단어와 관련된 전지식을 동시에 갖게 된다. 예를 들면 아이가 「사람」이라는 단어를 배우면 그 아이는 곧 사람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다. 늙은 사람이거나 외팔만 있는 혹은 외다리만 있는 사람도 포함하는 모든 사람을 총체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이것을 누구에게서 배우지 않아도 알게 되는데 그것은 현실을 해석하는 아이의 능력이 유전적 자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란 말은 인간의 원시적 언어에 속하는 개념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는 말을 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때부터 그 누구에게서도 배운 바 없는 복잡한 문법을 구사할 줄 알게 된다. 언어란 것은 그러니까 신체의 성장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현상이다. 언어는 가르쳐지는 것이 아니다.

끝으로 분명한 점은 언어 학습은 신체적 성장이 거치는 여러 단계와 대응적이다. 그러므로 언어는 육체적인 것이지 지적인 것이 아니다. 『미안하지만 증거가 있나요. 사례를 들 수 있나요.』『그럴싸한 설명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촘스키는 대답한다. 아이의 언어 습득 능력은 지능지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별로 재능이 없는 아이도 언어능력은 정상적이다. 구문력이 자동적으로 발동되어 모든 것이 저절로 작용한다. 환경이 이러한 학습에 그다지 영향을 주는 바도 없다. 촘스키에 따르면 시각장애 아동을 대상으로 실험해 본 결과 색감에 관련된 것조차도 시각장애가 언어 학습을 지체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시각장애 아동은 일반 아동과 마찬가지로 자동적으로 모든 단어를 쓸 수 있게 된다. 다른 형용사와 마찬가지로 색깔과 관련된 단어도 사용할 수 있다. 다만 실제의 사물에 이들 형용사를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볼 수 있는 아이들이지만 말이다.

 

어떤 단계 이후에는 인간은 그 이상의 학습이 불가능하게 되거나 학습을 하더라도 원래 가졌던 악센트는 그대로 유지하게 된다. 사춘기는 이런 생물학적 경계선인 듯싶다. 인간이 최초의 악센트를 유지하는 것은 생물학적 요소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으로서 이것을 바꾸는데 대해서는 생물학적 저항을 받는다. 이 악센트의 문제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서 생물학적 한계 안에서 발음을 정확하게 해내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생리학적 한계는 유년에 벌써 굳어 버린다.

 

촘스키의 말에 따르면 성인이 되어서 어학적 재능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실은 생물학적 성숙에 결함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 촘스키의 동료인 나이 많은 털보 교수들 가운데 아무런 지장 없이 용이하게 핀란드 말과 오세티야 (Ossetia : 소련 남부지방 이름) 말을 바꾸어 가며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어쩌면 겉모습만 나이 먹은 어린이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가설을 전적으로 배제할 수는 없다고 촘스키는 말한다. 우리는 현대 과학이 아직도 잘라 말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을 발전시키지 못한 회색지대에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더 어렵거나 더 쉬운 언어는 없다

촘스키의 이야기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은 자기네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우수한 것으로 믿는다. 혹은 자기네 언어가 더 명료하다고 믿거나 더 어렵다고 믿기도 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디드로 (Diderot)가 연상된다. 디드로는 프랑스어가 그 어순이 자연스러운 사고의 순서와 같기 때문에 과학적인 언어라고 여겼다. 그런 반면 독일어는  문학적 언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생각은 프랑스의 전역사와 문화를 특징 지었다. 이러한 생각은 전적으로 국수주의에 바탕을 둔 것이다. 언어에 우열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좋은 실례는 프랑스어와 영어다. 이쪽도 저쪽도 더 우수하다고 할 수 없다. 이 두 언어는 정치적 승리나 패배의 시기에 다른 언어들로부터 여러 가지 단어를 끌어모아 형성된 것이다. 우리가 언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학적인 현상이 아니다. 사실 그것은 사회 정치적인 개념이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으로는 사고 과정이 언어의 차이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는 아무데서도 발견할 수 없다. 언어가 상이함에 따라서 특별한 행동양식이 발생한다고 볼 수 없다. 나는 촘스키에게 헤브루어나 아랍어 같은 언어는 사람들을 어느 정도 예언적 환희에 빠져들게 하는 것이나 아닌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촘스키의 대답은 이 사람들을 환희의 경지로 끌고 가는 것은 그들의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문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헤브루어나 아랍어가 아니라 성서나 코란이란 것이다. 더욱이 이들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합리적 사고를 못하는 것도 아니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수학자도 프랑스어나 중국어를 사용하는 수학자와 마찬가지로 논리적이다.

 

그리고 어떤 언어는 다른 언어보다 더 어렵다는 말도 성립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일본어라고 해서 특이하게 색다른 것은 아니며 유럽 언어들과 그 구조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어린이들이 일본어를 배우는 것은 프랑스 어린이들이 프랑스어를 배우는 것이나 그 난이도는 같다.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다거나 더 지적 수준이 높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한 언어가 만일 어쩌다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면 아이들은 이 어려운 점을 제거해 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대가 바뀌면서 이 언어를 새로 제거해 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세대가 바뀌면서 이 언어를 새로 단장하는 것은 그들이기 때문이다. 어떤 언어도 어린이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까지 어렵도록 발전해 나갈 수는 없다고 촘스키는 말한다. 그렇게 된다면 한 세대만에 그 언어는 사멸해 버리게 될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어떤 언어는 더 어렵고 어떤 언어는 더 쉽고 가 있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어떤 언어도 점점 더 어려운 쪽으로 나아갈 수는 없다. 그러니까 옛날의 원시 언어는 단순했으며 거기서 점점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 왔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언어도, 어떤 사투리도 다른 것보다 특별히 우수한 것이 있을 수는 없다. 『한 나라의 언어는 방언이 발전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의 복잡한 정도는 똑같습니다.』전 국어와 방언의 차별은 정치가들이 만들어 붙인 것이다. 언어란 생득적인 것이므로 모든 언어는 애초부터 균일한 복잡성을 지니고 있다. 촘스키는 말하기를 만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언어를 공부해 보면 이 점에서 놀라게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들을 미개인으로 치부하려 들지만 그들의 언어는 어휘나 문법에 있어서 결코 간단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른 모든 기술 이전 사회에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이들 원주민의 언어는 극도로 풍부하다. 특히 혈족 조직이나 자연물에 대한 분류는 매우 잘 발달되어 있다. 미개 사회에 존재하는 단어가 문명 언어에는 없는 경우가 있다. 이 점은 자연이나 감각을 번역하려 들면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촘스키는 강조한다. 『어떤 언어도 복잡하지 않으며, 어떤 언어도 생소하지 않으며, 어떤 언어도 미개적이지는 않다.』


자연은 우파가 아니고 문화는 좌파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촘스키의 이론은 자기의 정치적 입장과는 모순된다. 우리 서양 사회는 자연적 발전론자들은 우익에 속하고 후천적 문화론자들은 좌익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기를 좋아한다. 19 세기 이래로 우익은 생득설 쪽을 지지하고 좌파는 후천적 획득만을 선호한다. 진보파들은 인간은 인간의 환경과 역사의 산물로 생물학적 유전적 측면은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촘스키는 지식인들이 환경과 교육의 중요성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들의 개인적 권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응수한다. 환경의 역할을 더욱 결정적인 것으로 부각하면 인간의 마음은 더욱 공백상태로 보이게 되고 따라서 지성인, 특히 교사들의 권위는 더 커지게 된다. 그래서 진보파 지식인들은 생물학적 결정론에 반대한다. 이것은 그들이 과학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주의를 전파하는 이데올로기의 관리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각자의 내부에 교사들의 간섭에 대항하는 도덕적 방어벽을 건설할 수 있는 자연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은 교사들의 기득권과 배치된다. 『사람들로 하여금 생득적인 것은 모두가 반동적이라고 믿게 하는 것은 권력을 추구하는 지식인과 정치 집권자의 왜곡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촘스키는 좌파 지식인인가. 자기는 지식인이 아니라 다만 한 사람의 과학자이고 인간일 뿐이라고 그는 대답한다. 자기가 니카라과나 팔레스타인 문제에 개인적 입장을 천명하는 것은 언어학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하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추가해서 말한다. 가장 자신을 놀라게 하는 것은 프랑스 지식인들이 그들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의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지닌 과학자로서의 권위를 남용하는 일이라고, 고고학이나 생물학이나 인종학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유일한 목표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있다. 기껏해야 언어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잃어버린 언어나 절멸되어 가는 언어를 보존하고 인류문명의 다양성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언어학을 통하여 세계를  변화시킬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이쯤에서 촘스키는 날더러 나가 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가서는 라틴아메리카에 있어서의 미 제국주의 반대 데모에 가담하고 있는 그의 제자들과 합류한다. 나는 쇼맨 촘스키에 한방 먹고 완전히 쓰러진 꼴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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